Part 1. 산업기능요원이 되다.
2021년 6월, 저는 병역특례를 받고 산업기능요원이 되었습니다. 산업기능요원이 되면 군부대가 아닌 회사, 공장에서 일을 하며 복무기간을 채우게 됩니다. 산업기능요원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먼저 병무청에서 운영하는 병역일터 누리집을 통해 병역지정업체에 이력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럼 업체는 이력서를 살펴본 뒤 면접을 진행했어요. 면접을 통과한 경우 해당 기업에 취업하게 됐습니다. 일반적인 취업 과정과 거의 동일했어요. 산업기능요원을 뽑은 업체는 관할 지방병무청에 해당 요원에 대해 편입신청을 하게 되고 해당 요원은 편입이 승인된 날부터 복무기간이 인정되는 구조입니다. 4급 판정을 받은 경우 2년을 근무해야 하고 1~3급을 받은 경우 3년을 일하게 돼요. 저는 4급 판정을 받아 2년 간 근무를 해야 했습니다.
세 곳의 업체에서 면접을 봤고 모두 합격했습니다. 딱히 제가 이력서를 잘 만들어서도, 면접을 잘 봐서도 아닌 것 같았어요. 업체들은 지원자가 일하는데 별 문제없으면 합격시키는 분위기였습니다.
입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우면서 근무환경이 제일 좋은 곳으로 선택했습니다. 군복무 시작이 순조롭게 진행된 반면, 저는 사실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할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산업기능요원이란 제도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산업기능요원이 되기 한 달 전, 때는 대학교 2학년 1학기, 학교 시험과 과제에 파묻혀 살던 어느 날 쌍둥이 형이 제게 다가와 "재혁아, 산업기능요원이라고 회사에서 일하면서 돈도 벌고, 군복무도 대체할 수 있는 게 있대. 게다가 사회복무요원이랑 복무기간도 별로 차이가 안나. 차피 대학교 다니면서 쓸 생활비 필요하니까 요거 같이 하자."라고 몹시 솔깃한 제안을 했습니다. 이 말 한마디에 마음이 홀라당 넘어가 어느새 첫 출근을 준비하는 저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귀가 팔랑거린 것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두 가지 상황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군 복무 기간을 채워야 했습니다. 저는 신체검사에서 4급을 판정을 받았고 사회복무요원으로 21개월 동안 군 복무를 해야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복무를 미룰 순 있었지만, 친구들이 하나둘씩 군대를 갔다가 돌아오는 걸 보며 저도 얼른 다녀와야 한다는 조바심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제게 생활비가 필요했습니다. 부모님껜 이미 학비를 부탁드리고 있었고 그 이상으로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과에서 공대로 교차지원하면서 이공계 기본 과목들을 처음부터 공부해야 했고 이를 위한 교육비가 꽤 필요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술 마실 돈도 필요했으며, 짝꿍에게 맛있는 밥, 멋진 선물도 사주고 싶었습니다. 돈을 벌려면 일을 해야 하는데 알바는 하면 할수록 내 시간을 너무 부질없이 흘려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찰나에 군복무도 해결하면서 돈도 많이 벌 수 있는다는 소식은 참 반가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한 산업기능요원은 2년을 모두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2021년 6월부터 2022년 7월 중순까지 만 1년을 채우고 다니던 회사에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만둔 이유는 높은 업무 강도와 과로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에 생산부 사원으로 입사해 품질, 포장, 출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로 항상 일손이 부족한 출하실에서 근무했고 품질, 포장은 어쩌다 일을 배우게 돼 다른 직원이 연·병가를 쓰게 되면 제가 투입되었습니다. 사실상 생산부의 모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출하실이었습니다. 출하 업무 특성상 원래 몸을 쓰는 일이라 힘들지만 우리 회사 제품들은 대부분 길고 무거워 부상도 잦고 힘도 훨씬 많이 들어갔습니다. 게다가 우리 회사의 출하실은 매일 잔업에 시달려야 했고 해외로 나가는 대형 건이 잡히면 특근도 서슴없이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제가 입사한 뒤로 관리자만 5번 바뀌었고 출하실에서 함께 일하던 산업기능요원은 출하실에 배치된 지 3개월도 안 돼서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당시 저도 온몸에 보호대를 차고 파스를 붙이며 일을 겨우 하고 있었지만 앞서 얘기한 두 가지 이유가 제게 무척이나 커 쉽게 그만 두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래도 한번 시작한 일인데 1년은 채워야 이력서에도 당당하게 적지 않겠냐는 괜한 똥고집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딱 1년 차가 될 때쯤 이젠 멈춰야 하는 시점이 찾아왔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그나마 함께 합을 맞추며 버티던 팀원들이 결국 하나둘씩 큰 부상을 입거나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하루에 쳐내야 하는 일의 양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제 몸도 점점 더 심하게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발목, 무릎, 허리가 아픈 건 당연한 거였는데 이젠 양손 팔목이 힘을 쓸 때마다 저리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주말마다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는데도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퇴사를 결심하게 된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품질부에 꽤 오래 일하고 나와 같은 증상을 오랫동안 겪어오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도 물리치료에 약물치료까지 병행하고 있었는데 증상이 나아지지 않고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분께서 더 이상 무거운 제품을 들기 어려워 업무를 비교적 힘을 덜 써도 되는 부서로 옮겨 달라고 회사에 요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회사의 입장은 몹시 차가웠습니다. 일을 하기 어려우면 관두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은 결국 챙겨야 하는 생계가 있어 그만두진 못하고 억지로 견디셨습니다. 저는 그 일이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제가 곧 겪게 될 미래였습니다. 그나마 몸이 성할 때 다른 직장을 찾거나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고 생각이 정리된 날 밤, 사직서를 작성했습니다. 입사할 때와 마찬가지로 퇴사 절차도 일반적인 회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생산부 팀장님과 인사 팀장님께 말씀을 잘 드린 뒤 사직서를 제출하면 회사에서 병무청으로 복무 중단 서류를 보냈습니다. 그리곤 한 달간 인수인계를 해주면 끝이었습니다. 인수인계가 끝나는 마지막 날 저녁, 잔업까지 모두 마치고 불이 꺼지는 출하실을 뒤로하며 근무복을 벗었습니다.
이렇게 보충역 산업기능요원이 퇴사한 경우, 선택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다른 회사에 재취업해 복무를 이어 가는 것, 다른 하나는 사회복무요원으로 편입되는 것입니다. 저는 컨디션을 회복하고 제 상황을 되돌아보고 싶어 사회복무요원으로 편입하고 군 복무를 잠시 미뤘습니다. 퇴사하고 나면 모든 게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몸은 좀 편한 반면 마음은 불붙은 장작처럼 쉴 새 없이 불안함에 뒤척였습니다. 회사를 다니며 보고 겪은 것들은 모두 충분히 제게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실적에 목숨을 걸며 매일을 상기된 얼굴로 스트레스 속에 살던 과장님의 얼굴도,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돈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억지로 출근해 줄담배를 하루 종일 피던 대리님의 얼굴도, 몸이 아파 쉬어야 하는데도 맘대로 연병가를 못 쓰던 주임님의 얼굴도 모두 같은 공대 출신 남자로서 제게 그리 먼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대론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 지난 경험을 정리했습니다.
Part 2. 전자제품회사 출하실에서 1년 간 일하며 느낀 점 3가지
지난 회사 생활 1년을 되돌아보며 정리한 생각은 크게 3가지였다. 먼저 앞으로 몸으로 돈을 버는 일은 지양하자. 출하실에서 일하기 전부터 생활비를 벌기 위해 편의점, 주차요원, 홀서빙, 주방 설거지 등 다양한 알바를 했었다. 그리고 이어서 출하실에서 일을 하게 되며 몸으로 하는 일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일이 고된 것은 둘째였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일을 하다 다치거나 더 이상 몸 쓰는 일을 못 하게 되는 경우였다. 할 줄 아는 것이 별다를 게 없는 경우 다른 일자리를 찾기도 어려웠고 결국엔 몸이 더 심하게 망가질 때까지 같은 일을 해야만 했다. 일을 하고 있지만 하면 할수록 오히려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두 번째로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쓰는 것이 부담스러워지는 때가 곧 온다. 학생 때까지만 해도 하루 24시간을 내 맘대로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면서부터 은퇴하기 전까지 일주일 70% 이상의 시간 일에 써야 하고 남은 30%의 대부분을 다음날 일하기 위해 쉬는 시간으로 사용해야 했다. 만약 직장에서 내가 하는 일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거의 삶의 80% 이상을 하기 싫은 일에 시간을 써야만 했다. 게다가 그렇다고 일을 쉰다는 건 사회인으로서 커리어적으로 리스크였고 생계가 있는 경우 더더욱 큰 불안 요소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대학 기간 동안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적극적으로 찾고 이루는 데 집중하자. 대학 생활할 때에는 나도 대부분의 대학생들처럼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가진 조건에서 내가 무얼 할 수 있고 어딜 지원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취업 자체가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판에 일단 취업을 하는 게 소망이었다. 하지만 막상 직장 생활을 하게 되면 나 자신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더더욱 없어졌다. 당장 맡은 업무가 바빴고 일 외 다른 생각들은 업무를 방해하는 잡생각에 불과했다.
점차 회사를 다니는 이유가 돈을 벌기 위해서가 되면서부턴 자아실현, 자부심, 행복은 더욱 찾기 어려운 것 되었다. 매일이 오롯이 생명 실습이 되었고 일터는 고달픈 삶의 현장이 되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진정으로 하고픈 일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평생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들었다. 맡은 업무가 무척 힘들더라도 즐거운 일,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힘든 걸음을 옮기는 순간조차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공부해야겠다고 강하게 마음먹게 되었다.
그럼 지금까지 내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일은 무엇이 있었을까? 한 기억이 곧바로 떠올랐다. 품질부 일이 바빠 한동안 제품 성능 검사를 도와줬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영업부로부터 흥미로운 요청을 받았다. '우리 제품에 관심 있는 고객사 공장의 환경이 이러저러한 데 해당 조건에서 우리 제품 몇 대를 어떤 위치에서 어떤 방향으로 설치하는 것이 가장 성능이 좋을까요? 최적의 솔루션을 도출해 주세요.'라는 내용이었다. 답변을 위해 연구팀 소속 몇 분이 품질실로 내려왔고 나는 그분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또 맡게 됐었다.
빠른 답변을 위해 나는 다른 품질부 직원들이 퇴근할 때에도 연구원분들과 함께 잔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실험 환경을 만들기 위해 파이프들을 케이블 타이로 묶어 고정하고 우리 제품들을 설치하고 성능을 측정하고 더 나은 개선점을 찾는 과정이 꽤나 재밌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데도 온전히 그 생각뿐이었다. 내가 제안한 아이디어가 좋은 성능을 내고 연구원분들께 칭찬을 받았을 때 느꼈던 짜릿한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때의 그 느낌을 되새기면서 나는 새로운 기술을 발명하거나 기존의 것을 개선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남은 학부 시간들을 온전히 연구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쏟아붓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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